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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8월 - 행복(5) "권력이냐 영향력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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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isionChurch
댓글 0건 조회 1,742회 작성일 22-07-29 11:22

본문

* 사도신경

* 찬송  -

* 기도  -                                

* 마음열기   

1)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감사한 일은?

2) 나를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 성경 – 마태복음 5장 33-37절

* 말씀나눔 : 행복(5) “권력이냐 영향력이냐”


오늘은 ‘권력’과 ‘영향력’이라는 단어를 비교해봄으로 이 두 단어가 우리의 ‘행복’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권력’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십시오. 어떤 그림들이 연상 되나요? ‘파워’, 왕관, ‘총’, ‘칼’.... 이런 그림들이 떠오르시죠. 

이번에는 그런 그림이나 단어들이 여러분 삶과 가정이나 공동체에 가득 차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과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어떨 것 같습니까? 결코 행복할 수 없겠죠! 

이에 우리는 다음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1. ‘권력’은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한다.  

한병철이라는 철학자가 쓴 “권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권력’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더군요. “권력이란 자아의 연속성을 창출해내려는 의지다” 그러니까 ‘나’라는 자아를 계속 키워서 이 세상 전체를 ‘나’라는 자아로 뒤 덮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권력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권력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속성이 사탄이 활동하고 있던 에덴동산에서 그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누구와 같이 될 수 있다’고 유혹했나요? 맞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권력’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집착을 보게 되는데, ‘권력’은 자기만족이 없습니다. ‘나’라는 자아가 이 세상을 덮고, 온 우주를 덮을 때까지 끝없이 자신을 확장해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권력의 확장이 아담과 하와를 행복하게 해주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불행이라는 늪에 빠지게 했죠. 

일본의 역사를 보십시오. 일본은 끊임없이 우리 조선땅을 넘봅니다. 그러다가 지금부터 400년 전, 1592년에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켜서 우리 민족을 힘들게 했는데, 그 전쟁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라는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일으킨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군 7만명이 전사했고 민간인은 15만명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2만명이 일본으로 끌려갔죠.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역사를 보십시오. 계속해서 자기를 확장시켜 갔죠. 그래서 ‘대항해 시대’를 열어 아메리카라는 대륙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 결과가 무엇이었나요? 그때부터 노예무역이 시작됐고, 그로 인한 인종간의 갈등과 반목과 상처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근대의 역사를 보십시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이 왜 일어나게 되나요? 독일이라는 한 나라 때문에 일어나게 되고, 2차 세계 대전의 중심에는 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지 아시죠? 맞습니다. ‘히틀러’(Adolf Hitler)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죽은 사람의 숫자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최소 5천 만명이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전체 국민의 숫자가 같습니다. 한 사람 안에 꿈틀대고 있던 ‘권력’에 대한 집착이 온 세계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중국과 러시아가 서서히 제국주의적 본성을 드러내고 있죠! 

기억하십시오. 내 의견만 옳고, 내 생각만 맞다고 주장하는 권력 지향적인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오만한 자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권력’이라는 욕망에서 해방되어 나도 행복하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요?


2. 과제를 분리하라. 

‘과제의 분리’에 대해서는 두 달 전에 소개해 드렸죠. ‘과제의 분리’가 무엇인가요? 나의 과제와 너의 과제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제안은 하되 강요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커피에 설탕을 몇 스푼 넣어서 드십니까? 저는 항상 블랙으로 마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목사님, 왜 그렇게 커피를 쓰게 드세요?” 하면서 설탕을 두 스푼 넣어줍니다. 제 기분이 어떨까요? 그분은 저를 “쓴 커피”에서 구원시켜 줬다는 자기 만족감으로 충만할지 모르지만, 저는요? 

이렇듯 과제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면 나는 행복할지 모르지만 다른 누군가는 불행한 하루를, 아니 한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중 그 누구도 타인의 생각을 좌지우지할 권세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이미 자녀를 키우면서 터득하셨죠!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엄마 아빠 말에 무조건 따르지만 조금만 머리가 굵어지면 엄마 아빠 말에 무조건 ‘yes'하던가요? 그렇지 않다는 것 이젠 잘 아실 것입니다. 하물며 내 DNA를 가지고 내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도 그러한데, 공동체 안에서 다 큰 성인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고, 내 주장을 우격다짐으로 집어넣어서 그 사람을 바꾸거나 조정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정작 본인들은 자신 때문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정의’로워서 그랬답니다, 본인의 성격이 ‘곧아서’ 그런답니다. 그 사람이 문제고, 그 사람이 바뀌어야 한답니다. 심지어 ‘교회’를 위해서 그랬고, 하나님을 위해서 그랬다는 사람도 있더군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상처받게 해놓고. 이렇게 나오면 답이 없죠!

그렇게 답이 없는 사람들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바리새인!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처음에는 저들에게도 많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들과도 대화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듣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정죄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어떻게 하셨나요? 그때부터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죠. 그러면서 그들을 보며 이렇게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 7:32)

결국 어떻게 됐나요? 입만 열면 ‘하나님’ 꺼냈던 바리새인들이 착하고 순한 어린양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끌고 가서 죽였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이 많은 조직(국가,사회,회사,교회)에서는 예수님처럼 순하고 착한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갑질과 등살에 못 버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타인의 과제(바운더리)를 침범하는 것. 그것은 “죄”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그래서 초대교회를 보면, 예루살렘에 모여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려고 할 때, 야고보 장로가 그 자리에 모인 형제자매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행 15:19). 야고보 사도가 뭐라고 말합니까? “내 의견에는”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내 의견을 가감 없이 나누십시오. 내 주장을 펼치십시오. 그러나 결과에서는 손을 떼십시오. 자녀들에게도 이런저런 삶의 교훈과 지혜를 전해 주십시오. 그러나 선택은 자녀에게 맡기십시오. 그러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3.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 

이제 ‘영향력’이라는 단어에 집중해보겠습니다. ‘권력’과 ‘영향력’은 둘 다, 다른 사람에게 ‘내 힘이 미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영향력은 다릅니다. 권력은 ‘타인의 힘’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고, 영향력은 ‘자발성’에 의해 움직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서 게임만 하고 있는 아들에게 엄마가 소리지릅니다. “야 컴퓨터 끄고 책좀 봐”.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소리 지르면서 정작 본인은 한국 방송국 3사 - MBC, KBS, SBS - 에서 방영되는 모든 드라마를 다 섭렵하고 있는 것입니다. 월요일에는 월/화 드라마, 수요일부터는 수/목 드라마, 토요일에는 주말 드라마. 요즘에는 넷플렉스에, 유트브까지 있죠. 이것은 ‘권력’일까요? ‘영향력’일까요? 맞습니다. 이것은 권력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어머니였던 ‘수산나 웨슬리’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열 아홉명의 자녀를 키우면서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도 한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게 되죠! 이것은 ‘권력’일까요? ‘영향력’일까요? 맞습니다. 이것은 ‘영향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삶은 ‘권력’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통해 이 세상을 에덴동산으로 바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향력’에는 반드시 “자기희생”이 따르고, “솔선수범”이 따릅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뭔가 부족한 모습이 교회에서 보이고, 목사에게서 보이고, 옆에 있는 형제자매에게서 보이면, 내가 먼저 솔선수범해서 본인이 생각하는 그 이상적인 모습을 실천해 가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독자’(Christian)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어두우니 손가락질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두움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를 지적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자신을 녹여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비판과 정죄와 율법을 통해 이 세상이 바뀔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구지 이 땅에 오지 않아도 됐을 것입니다. 왜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바리새인들은 땅에 차고 넘치니까요! 

오늘 우리 앞에는 두 단어가 놓여 있습니다. “권력이냐, 영향력이냐”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내가 머물다 간 자리마다 ‘행복’이라는 단어만 보여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 결단과 중보의 기도 

1. 내가 있는 자리를 밝게 비추겠습니다.    

2. 행복으로 가득한 가정과 속회되게 하소서.

3. 영육간에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형제자매들을 돌보시고 치유해 주소서.(중보기도) 


* 속회 헌금 - 찬송 ________  장

* 헌금 기도 - 인도자

* 광고 – 속장 

*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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