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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속회) 공과

21년 8월 - 비전(2)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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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isionChurch
댓글 0건 조회 2,404회 작성일 21-07-30 11:35

본문

* 사도신경


* 찬송  -


* 기도  -                                


* 마음열기   

1)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감사한 일은?

2)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자기 소개)


* 성경 – 요한복음 3장 16-21절


* 말씀나눔 : ‘Vision’(2) 사람(2020년 7월 2주 주일설교)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전이었음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을 걸만한 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았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vision”(비젼)인가요? 거기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욱 깊이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가 되길 바라면서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꿈 : 사람 

하나님의 꿈이 ‘메시아’였다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본문, 요한복음 3장 16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꿈을 담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보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시죠. 왜 그러셨을까요? 왜 하늘 보좌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내려오시고, 무엇을 위해 그 모진 수모를 당하신 뒤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것일까요? 그 이유와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우리 ‘사람’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비전이셨던 것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어ᄄᅠᇂ게 사람이 예수님의 비전이 될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사람”이 비전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내려오실 이유가 있었을까요?. “사람”이 예수님의 꿈이 아니라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필요가 있으셨을까요? 이제 명확해지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꿈이요, 예수님의 비전입니다. 잘 났든 못 났든, 가진 것이 많든 적든,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나이가 젊든 나이가 들었든, 건강하든 약하든 여러분은 소중한 예수님의 꿈이요, 예수님의 비전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저 십자가에 던지신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8,39)

오늘도 이 사랑이 우리를 붙잡고 있음을 믿음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고, 무시하고 멸시하며 아픔을 줬더라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꿈이요, 비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간혹 시험에 들거나 넘어질 때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예수님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예수님의 꿈이자 비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꿈이자 비전입니다. 


2. 오염된 인간성(人間性)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꿈이자 비전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 꿈을 지키고 이루어 가는 것이 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인가요? 우리 안에 있는 ‘인간성’이 오염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시는데, 그때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던 날, 이런 감탄사를 내뱉습니다.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창 2:23)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같은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 나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먹었나이다”(창 2:12). 타락의 모든 원인과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힘없는 여자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못되고 못난 습성 중 하나입니다. ‘잘되면 내 탓, 잘 못 되면 남 탓!’ 이로 인해 어떻게 되었나요? 아름다웠던 에덴동산이 한 순간에 지옥으로 바뀌고 말았죠.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원죄’의 속성은 에덴동산 같아야 할 가정의 평화를 갉아 먹습니다. 사회나 직장에서도 쓸데없는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주님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된 교회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덮어주고 서로가 배려하고 섬기는 공동체임을 알고는 있는데도 잘 안됩니다. 왜인가요? 자기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원죄’의 속성이 서로를 향해 생채기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죄’의 속성은 나 자신과의 관계도 갉아 먹습니다. 자 자신을 점점 더 깊은 동굴로, 어두움으로, 우울함으로 끌고 가고 있죠. 그래서 어두운 동굴에서 우리를 건져내 줄 “빛”이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빛으로 나오는 것을 주저하게 됩니다. 이렇게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 우리 안에 있는 원죄의 속성이 하나님의 꿈이자 하나님의 비전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전도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꿈과 비전인 ‘사람’마저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날 수 많은 사람들이 ‘포기’한채 살아가고 있죠. 어떤 이는 남편을 포기하고, 어떤 이는 아내를 포기하고, 어떤 부모는 자식을 포기하고, 어떤 자녀는 부모를 포기합니다. ‘아, 저 사람은 안돼. 어떻게 해도 안돼,...’ 심지어 나 자신도 포기할 때가 있죠. ‘나는 안돼...’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말 못하는 ‘동물’을 더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며 하는 대화보다 SNS로 주고받는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관계에 빠져들어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가나안 성도’(반대로 하면 ‘안나가’) -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는 출석하지 않는 성도 - 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우리 안에 있는 ‘원죄’의 강한 속성이 나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기하게 만들고, 주님의 몸된 교회의 연합마져 갉아먹고 있는 이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상처를 주고받는 악순환을 멈출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얼굴을 맛대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갈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애쓰고 노력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3. 이해 받기보다 이해하며 살자.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2천년 전 유대땅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십니다. 부유한 가정이나 헤롯 궁이나 로마의 시민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아비의 아들, 한 어미의 아들로 30년을 사신 뒤에야 비로소 사역을 시작하시죠. 그때 예수님의 나이가 서른이었습니다. 

3년여의 공생애를 보십시오. 예수님도 우리처럼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신 적도 있었고, 예수님도 우리처럼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한적 있었으며, 예수님도 우리처럼 비가 오면 비를 맞으셔야 했고, 너무 피곤하셔서 풍랑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서 곯아떨어지신 적도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십시오. 사랑하고 믿었던 제자 가롯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셨고, 사람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으셨고, 구타도 당하셨고, 옷이 벗겨지는 수치도 경험하셨고, 채찍에 의해 살이 찢겨 나가는 아픔도 맛보았고, 가시 면류관이 쓰여진채 사람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기 위해 고안된 십자가에서 모든 물과 피가 다 빠져나가는 고통속에서 운명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하면,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히어로’(hero)의 모습보다는 ‘미저리’(misery)일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일이 잘 풀릴 때 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성공할 때 보다 실패할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비전인 ‘사람’을 보다 더 잘 알고, 보다 더 잘 이해하고자 스스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한평생 놓지 않았던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람’에 대한 이해와 공부입니다.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보십시오. 가라지 비유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농부의 일상을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셨다면 결코 그런 말씀들은 나올 수 없습니다. 

‘헌 옷을 새 옷에 깁지 않는다’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여인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면 결코 그런 말씀들은 나올 수 없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드렸던 두 렙돈, 한 과부의 유일한 소망이었던 아들을 다시 살리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여인들과 과부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공부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어린아이나 병자를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공감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결코 그런 장면은 연출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해한 만큼 사랑하게 된다” 예수님은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셨고 ‘사람’에 대해 공부하셨습니다. 왜요? 예수님의 비전은 ‘사람’이었으니까요!

‘성 프란시스의 기도’에 이런 아름다운 대목이 나옵니다.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화합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당신의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전하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 사랑하게 하소서”

“한 사람도 상처받거나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셨던 예수의 꿈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 결단과 중보의 기도 

1.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가는 우리교회 되게 하소서.

2. 사랑방을 통해 예수님이 이 땅의 비전임이 보여지게 하소서.

3. 영육간에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형제자매들을 붙들어 주소서.(중보기도) 


* 사랑방(속회) 헌금 - 찬송 ________  장


* 헌금기도 -


* 코이노니아(나눔) - 오늘 사랑방 모임을 통해 어떤 은혜와 도전을 받았나요?


* 광고 – 사랑방장(속장) 


* 주기도문  - 다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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